본문 바로가기 글로벌 네비게이션

주변관광지

  • home
  • 해여림 빌리지
  • 주변관광지

명성황후 생가

1973년 7월 10일 경기유형문화재 제46호로 지정되었다. 고종황제(1863~1907)의 비 명성황후 민씨(1851~1895)가 태어나서 8세까지 살던 집으로 1687년(숙종13)에 부원군 민유중의 묘막으로 건립되었다. 당시 건물로서 남아 있는 것은 안채 뿐인데 1975년과 1976년에 한번 중수하였다가 1996년에 다시 수리하면서 행랑과 사랑, 별당 등을 함께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세종대왕릉

영릉(英陵)은 조선 4대 조선 4대 세종(재위 1418~1450)과 부인 소헌왕후 심씨(1395~1446)의 무덤이다. 세종은 정치ㆍ경제ㆍ사회ㆍ역사ㆍ문화 등 각 분야에서 조선시대 문화의 황금기를 이룩한 왕이다. 세종 28년(1446)에 소헌왕후가 죽자 헌릉 서쪽 산줄기에 쌍실 무덤인 영릉을 만들었다. 동쪽 방은 왕후의 무덤으로 삼고, 서쪽 방은 왕이 살아 있을 때 미리 마련한 무덤으로 문종 즉위년(1450)에 왕이 죽자 합장하였다. 조선왕릉 중 최초로 한봉우리에 서로 다른 방을 갖추고 있는 합장무덤을 하고 있다. 무덤배치는 『국조오례의』에 따라 만든 것으로, 조선 전기 무덤배치의 기본이 되었다. 세조 이후 영릉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무덤을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옮기지 못하다가 예종 1년(1469)에 여주로 옮겼다. 무덤의 주변에는 12칸의 난간석을 둘렀다. 무덤을 옮길 때 전에 있던 석물인 상석, 명등석, 망주석, 신도비들은 그 자리에 묻었으나 1973년에 발굴하여 세종대왕기념관에 보존되어 있으며, 훈민문ㆍ세종대왕동상ㆍ세종전 등은 1977년 영릉정화사업 때 세운것이다.

신륵사

신라 진평왕때 원효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고려 말인 1376년(우왕2) 나옹(懶翁) 혜근(惠勤)이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한데, 200여 칸에 달하는 대찰이었다고 하며, 1472년(조선 성종 3)에는 영릉원찰(英陵願刹)로 삼아 보은사(報恩寺)라고 불렀다. 신륵사로 부르게 된 유래는 몇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 하나는 “미륵(혜근을 가리킴)이, 또는 혜근이 신기한 굴레로 용마(龍馬)를 막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려 고종 때 건너마을에서 용마가 나타나, 겉잡을 수 없이 사나우므로 사람들이 붙잡을 수가 없었는데, 이 때 인당대사(印塘大師)가 나서서 고삐를 잡자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神力)으로 말을 제압하였다 하여 절 이름을 신륵사라고 했다”는 것이다.

효종대왕릉

제 17대 효종(재위1649∼1659)과 왕비 인선 왕후 장씨가 모셔진 쌍릉이다. 효종릉 역시 능역과 푸른 소나무들이 주변에 울창하여 그윽함을 풍기지만 세종릉과 바로 붙어 있어 찾는 이가 적어 사방이 조용하고 호젓하다.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로 1619년(광해군11) 5월 22일 태어나 1626년(인조4) 봉림대군에 봉해지고 1636년(인조14) 병자호란으로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인질로 8년간이나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가 풀려 나와서 1646년(인조23) 소현 세자가 변사하자 뒤를 이어 왕세자에 책봉되고 1649년 (인조27) 5월13일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하였다. 효종은 즉위 후 대동법을 실시하고 상평통보를 주조하여 화폐를 널리 보급하였다. 조선왕조가 당한 굴욕을 씻고자 청나라 정벌을 계획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659년 5월 4일 재위 10년 만에 창덕궁 대조 전에서 승하하였다.

고달사지

고달사지는 신라 경덕왕 23년(764)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며, 고달원이라고도 하는데 신라 이래의 유명한 삼원(三院) 즉 도봉원(道峰院), 희양원(曦陽院), 고달원(高達院)중의 하나로 고려시대에는 국가가 관장하는 대찰이었으므로 왕실의 비호를 받았던 곳이다. 현재 이곳에는 국보 제4호인 고달사지 부도와 보물 제 6•7•8호가 있으며, 이들 석조유물들은 하나같이 넘치는 힘과 호방한 기상이 분출하는 가운데 화려하고 장엄한 기운을 간직하고 있다. 창건 당시의 사찰은 실로 광대하여 지금의 상교리 일대가 전부 사역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절 부근의 큰 마을이 형성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지금 광활한 사역에는 유물만 남아 있다. 지난날의 영화를 잊은 듯 무성하게 자란 잡초에 묻혀 있으며,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가 진행 중이다.

파사성지

파사성 정상을 중심으로 능선을 따라 축성한 파사성은 성벽 등 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으며, 둘레는 약 943m이며 성벽 중 최고 높은 곳은 6.25m나 되나 낮은 곳은 1.4m되는 곳도 있다. 천서리를 면한 동문지(東門址), 금사면 이포리를 면한 남문지(南門址)에는 문앵(門櫻)을 세웠던 고주형 초석 2기와 평주 초석이 남았고 동문지에는 옹성문지(甕城門地)가 남아 있다. 한강에 연하여 있어 성 일부는 강 언덕에 돌출된 자리를 잡아 남한강의 상 하류를 한눈에 관찰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삼국시대에 축성되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선조 25년(1592년) 에 임진란이 일어났을 때 유성룡의 발의에 따라 승군총익인 의암(義巖)이 승군을 동원하여 쌓은 둘레 1,100보의 성첩을 중수한 기록이 있다 (왕복 1시간 소요)